복제가능한 문화상품의 윤리

정진명의 굳이 써서 남기는 생각 @jm@guji.jjme.me

복제가능한 제품이란 복제에 드는 비용이 창작에 드는 비용보다 적고, 창작에 관여하지 않은 자가 복제하는 것이 용이한 제품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디지털 제품(소프트웨어와 데이터)은 복제가능한 제품이다. 종이책도 전통적으로 이 범주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금형을 통해 제조해야 하던 플라스틱 제품은 복제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3D스캐닝 기술과 3D프린터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점점 복제가능해지고 있을 것 같다.

이 글에서 문화상품이란 취향과 선택지의 다양성을 통해 매 소비자마다 매 상품에 대해 느끼는 가치, 혹은 지불하고자 하는 가격 의향(Willingness to Pay; WTP)이 거의 0까지 떨어질 수 있는 상품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서적을 비롯해, 만화, 음악, 게임, 영상 등의 대중예술제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자면 호러 만화는 충분히 상품 가치가 있지만, 그것이 취향이 아닌 사람들은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굳이 그것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취향 뿐 아니라 선택지의 다양성도 필요하다. 전시회나 행사,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영화는 시간을 고정시켜놓으면 고를 수 있는 축이 한정적이고, "하필이면 그 때 영화를 봐야 하기 때문에" 취향이 아닌 것을 구매할 수 있다: WTP가 0보다는 높아지는 것이다.

복제가능한 문화상품은 언급한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는 상품이다. 이런 상품들은 자주 무단복제로 인한 사회현상과 논란을 겪었다. 냅스터, 소리바다, 와레즈, P2P, 토렌트, 밤토끼…. 이 글에서는 복제가능한 문화상품권을 무단으로 복제하는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생각은 그것들은 '도둑질'이고, 도둑질을 그냥 안 하면 된다는 것,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 도둑질을 처벌하는 것이다. 꽤 동의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도둑질은 벌어지고 있으며, 막는 것은 어렵고, 처벌하는 것조차 합의하기 어렵다.

복제가능한 제품의 도둑질을 처벌하기 어려운 것은 근본적으로 복제가능한 제품을 복제하는 것에 공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서관을 통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지식에 접근하기를 권장하며, 저작권과 특허법은 창작자에게 제한된 재산적 권리만을 허용하고 그것들을 언젠가 인류 모두의 지식으로 돌리기를 강권한다. 우리는 빌린 만화책을 몇몆 친구들끼리 돌려 읽는 것을 금지할 수 없을뿐더러, 할 수 있다고 하면 금지하는게 맞냐고 물어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절판되었지만 높은 수요가 있는 인문 도서를 불법으로 제작해 판매한 일당이 검거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럼 이제 그 수요들은 어떻게 채워지겠는가? 그 수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는 일인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냐는 것은, 많은 경우 동의를 얻을 수 있어 보인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 읽은 만화책을 친구에게 빌려줘서 읽게 하는 건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겠지만,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친구가 만화책을 읽는 건 권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들 할 것이다. 꽤 명확해 보이긴 하지만, 그런 판단의 이유는 대개 한 가지로 줄어들지 않고 복합적이다. 두 경우 다 만화책을 샀을지도 모르는 친구가 정당한 권리자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막았지만, 하나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인식이 있고 하나에는 부당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다. 단순히 '정규 루트로 돈을 주고 구매했느냐' 이외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두 사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결국,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맞다고 생각한다.

결국 복제가능한 제품에서 복제가 어디까지 해도 괜찮은 일이냐는 것은, 생각보다 총의가 모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특히 디지털 제품은 '구매' 계약보다 '사용권' 개념의 계약이 많아지게 되는데, 이 경우 소비자 뿐 아니라, 창작자와 유통 플랫폼 간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넷플릭스가 '가족'의 범위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좁힌 것처럼,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가 '옆 자리에서 같은 영상을 보는 사람마다 추가 요금'을 받는 체계로 돌아가는 일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서비스 제공자 역시 이 게임의 플레이어다. 무엇이 괜찮으며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는 결국 그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하는 과정과 정해진 형태(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결코 아름답지 않고, 현실 타협적이며, 많은 경우 정당한 것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받지 못하는 상태다.

지금까지 복제가능한 제품 이야기를 했으니까, 복제가능한 문화상품 이야기로 좀 더 좁혀서 이야기해 보자. 복제가능한 문화상품은 특이하다. 한 편에서는 환금성 없는 '경험'성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서 WTP가 적절한 가격일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질 수도 있다.(돈을 오히려 주면 그것을 소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복제의 가격이 매우 낮다. 즉 한 번 만들어지는 데는 많은 노력과 고통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복제하는 비용이 낮고, 개별 작품에 지불하려는 가격 의향은 한없이 낮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복제가능한 문화상품의 무단 복제는 창궐할 수 있다. 만화는 지금도 그 고통을 전면적으로 받고 있는 분야일 것이다.

결국 음악 파일의 불법 공유 이야기가 잘 안 들리게 된 것은 아이튠즈가 들어서고 나서였고, 게임의 불법 공유 이야기가 잘 안 들리게 된 것은 스팀이 들어서고나서였다. 그 기술들이 불법복제를 차단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거기에 돈을 낼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음악 창작자들이 다음 문제로 스트리밍 플랫폼의 분배 비율과 생계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궁극적인 문제는 불법 공유는 아닐 것이다. 결국 거기에서 종사하는 사람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우리가 실제로 추구하는 목표일 것이다. 불법 공유 사이트로 정당하지 않게 이익을 보는 무리들을 처벌하는 것은 훌륭한 사회 정의 추구이지만, 이 목표의 측면에서는 보조적인 ㅂ행동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저작권의 정신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저작권의 근본 정신은, 지적 재산권 제도를 뒷받침하는 근본 정신은 지식과 창작이 공유되어 인류의 공통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 재산권은 단지 새로운 지식과 창작물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참가자를 넛지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여러 복잡성을 생각할 때, 지적 재산권에 대한 엄격한 보호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일이 진흥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법과 그 집행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단계 더 근본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밤토끼가 닫히지 못해 사람들이 만화를 그리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밤토끼가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만화를 그리지 않게 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다. 스팀에서 게임을 팔면 되고 불법복제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창작자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민을 투영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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