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인간
정진명의 굳이 써서 남기는 생각 @jm@guji.jjme.me
서지정보
서명: 놀이와 인간
저자: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
역자: 이상률
출판사: 문예출판사
출간일: 1994년 4월 20일
원서명: LES JEUX ET LES HOMMES
원서 출간일: 1958년
생각
『놀이와 인간』은 『호모 루덴스』로부터 이어지는, 놀이를 통해 사회를 분석하려고 한 저술의 계보에 있는 책입니다. 게임을 만들다가 재미와 관련된 '이론'을 찾을 때가 있는데, 그 중에서 언급되는 알레아, 아곤, 미미크리, 일링크스 등의 분류와 파이디아, 루두스 같은 개념이 이 책에서 나왔습니다. (비디오) 게임에 맞게 해석한 버전이 아니라, 실제로 저자가 무엇을 어떻게 서술했는지를 보기 위해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하위징아와 마찬가지로 놀이를 통해서 사회를 설명하려 합니다. 하위징아는 역사적으로 사회의 어떤 요소들이 놀이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분석했는데, 이 책의 주된 접근은 놀이의 분류이고, 사회에 어떤 분류의 놀이가 강하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따라서 설명하려 합니다.
저자는 사회를 현기증과 역할놀이가 지배하는 원시사회, 저자의 표현으로는 '혼돈의 사회'와 경쟁과 운이 중요한 질서있는 사회, 혹은 '회계의 사회'로 나누며(dpp. 292-293/761),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이행을 '비범한 민족'(dp.333/761), '뛰어난 문화'(dp.428/761)가 해낸 것으로 묘사합니다. 혼돈의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서 민족지학적인, 그러니까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한 동시대의 사회로부터 자료를 끌어오고, 비인류학적인 접근-그러니까 통계 자료로 집계되는 '비경제적 활동' 같은 예시를 들 수 있는, 경쟁보다도 운이 (저자에게 바람직한 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에서는 '과도기 사회'(dp.479/761)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제가 이런 분야를 제대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저는 이런 '문명의 단계'를 가정하는 이야기에 조건반사적으로 반감이 듭니다. 정제된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소박하게나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일단 여러 사회들에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차이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들을 서로 다른 놀이의 요소들의 강하고 약함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보라는 시계열에 놓고 보는 것에는 '내가 속한 사회는 진보한 사회다'라는 자존감을 채우는 것 이외의 쓸모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제복이 현기증 사회의 가면을 대신한다"(dp.440/761)고 적고, "제복은 개인을 공정하고 불변적인 규칙의 대표자, 봉사자로 만드는 것이지, 전염되기 쉬운 열광에 빠져버린 희생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dp.441/761)라고 도 적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제복을 입은 유능감이 제공하는 열광은 그의 시대에도 있었으며, 우리 시대에도 있으며, 그 사이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보이는 이러한 요소들의 발호를 무시하거나, 그 근거를 짚어내는 데 실패하는 것에는 큰 비용이 따르리라고 생각합니다.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제게는 이 책들을 읽고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입니다.
번역자/편집자의 판단으로 이 책에 포함된 「놀이와 성스러움」도 흥미로웠습니다. 하위징아가 구분하지 않은 놀이와 성스러움에는 사실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포함된 글입니다만, 글쎄요. 저는 저자가 말하는 성스러움의 '내용'도, 기도가 사람들이 택한 기본적 종교적 태도이고 그 태도의 반대편에는 주술사가 성스러운 힘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쓰려는 태도가 있으며(dp.599/761), 놀이와 성스러움이 세속을 사이에 두고 서열을 구성한다(pp.608/761)는 데에도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글쎄요, 일단 제가 그렇게 성스러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제일 큰 이유겠지만, 사람들의 종교적 태도가 과연 주술적이고 기복적이지 않은가 같은 의문이 있는 것이 그 다음이겠고, 왜 성스러움 말고 다른 '힘'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는가? 예를 들면, 놀이-세속-법의 힘이라는 위계는 어떠한가? 놀이-세속-시장경제는 어떻고? 무엇이 저자에게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나?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제가 성스러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질문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원래는 (비디오) 게임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생각하기 위해 손에 잡은 책인데, 어쩌다보니 사회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군요. 맥락이 달라지지만, 『Ultimate Booster Experience』라는 VR 게임을 추천드립니다. 자이로스윙과 같은 놀이기구에 탄 경험을 1인칭으로 재현한 게임인데, 비디오 게임에서 다른 게임이 보여주지 못한 일링크스를 유발한 독보적인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곤과 알레아의 경합에 대해서 생각하면 침착맨의 "이 게임에 프로게이머가 있다고요?"라는 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게임에 임의적인 요소가 어떤 카드가 뽑힐 지 이외에는 특정 직업의 기믹, 제한된 카드들에만 들어있었고 e-sports적인 인기가 있었던 초창기의 『하스스톤』과, 발견 키워드를 포함해 수많은 카드들에 랜덤성이 포함되고, 대회보다는 개별 스트리머의 경험을 즐기게 된 요즘의 『하스스톤』을 비교하게 되기도 하네요. 후자는 저자가 '미미크리가 타락하고 희석된 형태'(dp.403/761)라고 지적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자가 오늘날의 비디오 게임들을 보고 증보판을 낸다면 과연 어떤 내용들이 추가로 붙을까요? 음, 생각해봤자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이 책을 계승해서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현실(가능하면 사회와 비디오 게임 둘 다)에 대해 무언가 써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