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경험을 한 날은 그날의 인상적이지 않은 순간들까지도 모두 기억에 남는다. 작년 12월 3일도 그랬다. 출근 둘째 날이었고, 이것저것 교육을 듣느라 종일 정신이 없었다.

7시쯤 퇴근해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내 인사 정보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슬랙 메시지가 왔다. PD수첩이 나오고 있는 MBC를 비롯해, 지상파 어디에서도 속보조차 뜨지 않아 가짜뉴스에 낚였다고 생각했다. 네이버 뉴스에 들어가자 단신이 몇 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어?"하는 소리를 내자 옆에 있던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셨다. "윤석열이 계엄 선포했어요", 아버지는 되려 그런 가짜뉴스 보지말라며 웃으셨다. 그리고 바로 리모컨을 잡고 YTN을 틀자...

윤석열이 격앙된 목소리로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만 봤다. 정말 '계엄'이라는 단어을 꺼내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종북좌파니, 반국세력이니하는, 기념일 연설마다 반복하던 헛소리에 이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그 말이 나왔다.

최루탄이 터지는 6월 항쟁 자료영상들과 군인이 민간인을 폭행하는 5.18 광주에서의 사진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오늘 이 시간부로 끝을 알 수 없는 암흑기가 시작된다는 생각부터 수 십년이 지난 훗날, 독재가 당연해진 한국 사회에서 이 순간을 돌아보는 상상까지 했다.

아버지는 국회가 계엄을 해제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계엄을 해제해도 우리가 절대로 계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만 같아서 암담했다.

0

If you have a fediverse account, you can quote this note from your own instance. Search https://social.silicon.moe/users/parksb/statuses/114234353187685615 on your instance and quote it. (Note that quoting is not supported in Masto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