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에게 선택권을 주면 조직이 성장한다 — 한 제도의 이야기
주영택 @soomtong@hackers.pub
개발자 크레딧 제도:
우리 회사에는 지금은 폐지된 개발자 크레딧(포인트)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개발자가 스스로 업무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의 현금성 포인트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 기본 구조
- 개발자는 근속 기간에 따라 크레딧 포인트를 적립받는다.
- 입사 후 1년이 지나면 정해진 금액이 기본으로 채워지는 방식이다.
- 적립된 포인트는 업무에 필요한 아이템 구매에 사용할 수 있었다.
- 하드웨어(노트북, 주변기기 등)
- 소프트웨어(개발 툴, 라이선스 등)
- 마이너스(선지급) 크레딧
입사 직후에는 근속 기간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포인트 잔고가 0이다. 그래서 회사는 입사 시 약 3년치 크레딧을 미리 ‘마이너스 통장’처럼 선지급해 주었다.
이 초기 마이너스 크레딧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개발자 환경을 스스로 꾸릴 수 있도록 지원
- 입사하자마자 필요한 장비를 바로 구매해 업무 환경을 즉시 갖출 수 있다.
- 근속 유인을 제공
- 회사가 먼저 3년치를 선불하는 대신, 그 기간 동안 근속해 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하면 자연스럽게 마이너스가 상쇄되도록 설계된 구조였다.
개발 장비와 업무용 소프트웨어에 투자하는 문화가 왜 중요한가?
나 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월급이 200만 원 정도였던 시절에도 키보드, 마우스, 주변기기 같은 장비나 몇 만원 이내의 소프트웨어를 직접 찾아보고 구매하는 걸 즐겼다. 컴퓨터 본체나 노트북은 어느 정도 가격대가 시대마다 정해져 있어서 선택 폭이 비교적 좁지만, 모니터는 가격과 품질의 편차가 매우 큰 카테고리다. 어느 정도 써봐야 진짜 품질 차이를 느낄 수 있고, 이게 업무 효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나는 이런 장비들을 많이 사용해보고 추천도 많이 해주면서 “나에게 맞는 장비를 고르는 안목”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하지만 이런 안목은 직접 써보기 전에는 절대 생기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다.
이 업계 역사의 초기부터 우리는 보통 소프트웨어에 돈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 사이 많은 이벤트가 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핵심 소프트웨어를 제외하고, 실제로 유료 소프트웨어 중에는 개발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주는 제품이 굉장히 많다.
물론 요즘은 VS Code처럼 무료 소프트웨어가 워낙 잘 만들어져 있고 나도 잘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유료 도구들이 제공하는 완성도와 안정성, 깊이 있는 UX는 무료 도구가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다양한 유료 소프트웨어를 구매해 쓰며 업무와 생산성 향상에 투자하는 편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로 돈을 버는 사람이 좋은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게 업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면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도 이런 문화가 널리 퍼져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좋은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써본 경험이 부족한 동료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다 회사 지급 장비의 '기본 값' 수준에서 멈춰져 있었고, "업무용 소프트웨어에 투자하는 것이 결국 본인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일"이라는 감각이 덜 퍼져 있었다.
지금은 의도치 않게 LLM 기반의 구독 서비스가 흐름을 바꾸고 있다.
개발자 크레딧 제도는 이 문화를 바꿀 기회였다.
그러던 중 도입된 개발자 크레딧 제도는 구성원들이 마음 편하게 장비와 소프트웨어에 투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 직접 고르고
- 직접 써보고
- 자신의 업무 스타일에 맞춰 최적의 환경을 꾸며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이건 단순히 장비를 사는 문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맞는 최고의 개발 환경을 스스로 구성해보는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개발자 크레딧 제도가 팀과 문화에 남긴 긍정적 영향
전임 CTO께서 선진 문물을 전수하듯 우리 팀에 개발자 크레딧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내가 가장 긍정적으로 본 부분은, 내가 오랜 기간 장비와 소프트웨어에 투자하며 쌓아온 경험과 안목을 동료들과도 나눌 수 있게 된 점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난 개발자들은 스스로 업무 장비에 투자해 본 경험이 적었다.
실제로 회사에 처음 왔을 때 동료들의 업무 환경을 보면 대부분:
- 회사에서 지급하는 기본 모니터
- 번들 키보드와 마우스
- 무료 소프트웨어 위주 구성
그 이상의 장비에 투자를 해본 경우가 드물었다. 십만 원이 넘는 고급 마우스나,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춘 모니터, 혹은 유료 개발 툴을 구매하는 경험은 흔치 않았다.
물론 나처럼 장비나 툴에 투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에서 준 것만으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환경 속에 있었다.
크레딧 제도는 개발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의 문을 열었다.
개발자 크레딧이 생기면서 구성원들은:
- 자신이 원하는 장비를 직접 선택해보고
- 고급 장비를 사용해보는 경험을 하고
- 유료 소프트웨어가 주는 높은 품질을 체감하며
- 업무 환경을 스스로 설계하는 감각을 갖게 되었다
이건 업무 생산성에 갑자기 수치로 드러나는 변화는 아니지만, "업무 환경의 수준이 확실하게 상승하는 경험"이었다.
좋은 장비와 좋은 소프트웨어를 고르는 눈이 생기고, 그 감각이 팀 전체의 문화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나는 이 제도가 큰 긍정적 효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도의 한계도 있었다.
어떤 제도든 그렇듯, 일부 구성원이 제도를 과하게 사용하거나 경계선에서 악용하는 사례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제도 그 자체의 문제보다는 운영 체계와 규정의 조정으로 해결 가능한 범위였다.
최근 회사가 상장하면서 법적·회계적 투명성 기준이 높아졌고, 특히 장비 재고 관리나 비용 처리 규정이 까다로워지면서 결국 개발자 크레딧은 폐지되었다.
이 결정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제도가 개발 문화에 남긴 긍정적 영향은 분명했다고 느낀다.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면...
만약 내가 예산을 정하고 그런 결정이 가능한 회사나 조직을 운영하게 된다면, 반드시 이 제도를 현대화된 형태로 다시 도입하고 싶다. 좋은 도구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는 개발자 개인을 넘어 회사 전체의 산출물과 문화를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