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어에는 지진을 뜻하는 고유어가 없다...?
마인어는 사용인구로 따지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맹주라 할 수 있는 큰손이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지역에서 쓰이며, 총 화자는 2억 5천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니, 한국어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규모다. 언어학계는 마인어의 조상이 PAn(Proto-Austronesian language, 오스트로네시아조어)이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PAn 은 수천 년 전 타이완섬에 살던 사람들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언어다. 이 사람들은 거대한 타이완섬에 살다가, 어째 답답했는지 아니면 거기 계속 살다가는 먼 미래에 정체자를 배워야 하는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 바다로 뛰쳐나갔다. 이들은 유유히 배를 타고 대양을 누비며 세계 곳곳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근대에 원양 항해라니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 아닌가? 게다가 타이완섬 앞으로 나가면 약속의 열대저기압 지옥태풍존이잖아? 그런데 PAn 으로부터 분화한 언어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분포 범위를 보면 무시무시하다. 동으로는 태평양 건너 남미에서, 서로는 인도양 건너 아프리카 대륙 앞 마다가스카르에 이른다! 유럽인들이 "Age of Discovery" 운운하기보다 수천 년 전에, 나침반도 육분의도 없던 시절에, 지구에서 가장 큰 바다를 건너 다닌 비결? 현대의 학자들은 이런저런 짐작만 할 뿐이다. 이들의 항해술은 주로 문자가 아니라 구술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튼 기원이 타이완섬이고, 타이완섬은 환태평양 지진대의 영향권에 있으므로, PAn 에도 "지진"을 뜻하는 어근이 있는 것은 거의 확실시된다. 현재 언어학계의 다수설은 linuʀ 이다. 여기서 많은 파생형이 발생하였는데 예를 들어 linog 만 봐도 수우우많은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들이 이 말을 "지진"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인어에는 이 "linuʀ"에서 파생한, "지진"을 뜻하는 고유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것일까? 당장 지리적으로나 언어계통적으로나 마인어와 인접한 자바어에도 linuʀ 에서 왔음이 분명해 보이는 ꦭꦶꦤ꧀ꦝꦸ (lindhu) 가 있는데, 마인어에서는 뜬금없이 gempa bumi 라는 표현을 쓴다. 알고 보면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भूमिकम्प (bhūmikampa) 에서 온 것이다.
마인어의 조상인 고대 말레이어에 산스크리트어 차용 단어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진"은 인간 생활에 직결되는 중요한 단어이고, 바로 근처의 다른 모든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정착지에서 모두 "linuʀ" 파생형을 쓰고 있는데, 왜 고대 말레이어는 "지진"의 고유어를 버리고 산스크리트어를 썼을까?
흥미로운 가설은, 하필 마인어가 분화 형성된 지역만 지진대를 멋지게 비켜 가면서, 지진이 너무 오랫동안 없었기 때문에 (!) 고유어가 사멸했다는 것이다.
마인어는 오늘날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널리 쓰이지만, 옛날에는 말레이 반도와 말레이 제도에서 주로 쓰는 언어였고, 그보다 더 아주 먼 옛날에는 보르네오 섬의 서부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ArcGIS 의 동남아시아 지진 지도를 보면, 이 지역들만 절묘하게 지진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